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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4.07 나는 아직 초보 채식 주의자다.
- 나는 아직 초보 채식 주의자다.
- 끄적끄적/끄적끄적
- 2003. 4. 7. 00:01
- Posted by 아홉
그동안 엄청나게 먹었던 고기(두근은 기본이쥐...)들과, 우유(역시 1000ml 원샷은 기본 아니었던가), 계란(후라이 하면 10개는 넘게 먹었던 기억도 있군)등 이런것들을 왜 포기 했을까??
글쎄....
내가 무엇을 하던지...별로 큰 이유를 두지 않는편이라...
그런 물음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원래 이기주의적인 사람이니...내 건강때문이라고 해두자..
완전한 채식이라는것 생각했던것 보다 더 힘들다.
이렇게 힘들지는 몰랐다.
이렇게 힘든걸 왜 시작했을까??
대부분의 채식 주의자들과 마찬가지이지만, 큰 이유를 두가지 이야기 들자면, 내 자신의 건강과 나 자신 이외의 생명존중 때문이다.
채식이 인간의 건강과 무슨 관계 있나??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다. 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여러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본 결과 잡식중에도 채식동물에 더 가까울것이라 생각 한다.
특히 동양인(그중 한국인)은 오랜 채식생활로 서양인보다 장이 길게 진화 했기 때문에 서양인 보다 더 육식보다는 채식에 더 가까울것이다.
채식동물에게 억지로 육식을 시키게 되면, 유전자 변이가 온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이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면, 유전자 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체에 나쁜 영향이 있다는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생각한다.
입이 즐겁자고, 몸이 나쁘게 되는걸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고기를 먹지 않게 되면 인체에는 나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가??
아니다. 우리가 육식으로 섭취하는 영양분의 대부분을 채식으로 대체 할 수 있으며, 채식으로 섭취 할 수 있는 영양분이 우리몸에 더 좋다고 한다.
예로 단백질 하나만 보더라도, 식물성 단백질과 동물성 단백질 모두 인체에 동일하게 반응하며, 식물성이 좀 더 빠르고 더 잘 흡수된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고기로 흡수 할 수 있는 영양분은 필요 없다고 한다.
이외에 여러가지 이유로, 오래전부터 채식주의를 실행하고 싶었지만, 망설이다가, 인물과 사상 25권에 홍윤기씨가 쓴 인간과 동물은 평등한가 (동물 권리의 인정은 '인간을 위한' 필요 인가, '그 자체의' 도덕적 의무인가) 라는 글을 읽고 시작해야 겠다고 느끼고, 실행에 옮겼다. 생명존중에 대해서 매우 인상깊게 읽은 글이다.
아래 댓글로 달아 놓았습니다.
엄청 긴글이라 옮기기 진짜 힘들었음을 밝힙니다....^^;;
벌써 시작한지 한달을 넘어 두달째로 가고 있다...
크게 힘든건 모르겠지만, 양념되어 있는 돼지고기를 보면 매우 많이 흔들린다.
아무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던게 돼지 불고기 였나 보다.
그리구, 사브레 과자....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였는데..계란과 버터 범벅...-_-;;
채식을 시작한 이후에 나름대로의 사회생활에 벽을 느껴서 완벽한 채식 보다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지켜 가야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혼자 있을때는 철저히 지켜 가겠지만,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서 그 안에 있게 될때는 눈에 보이는 고기, 계란, 우유만은 절대 먹지 않는 방법으로 전환이 될것을 예상한다.
뭐...원래 원만한 사회생활과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쩝
여하간, 하여간, 나는 채식 주의자다.
혹시라도 채식에 대해 궁금한 사항은 아래댓글로 질문 달아 주시면 내가 아는 한도에서 열심히 답변 드리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아직 나는 아직 초보 채식 주의자다.
작지만 큰 한걸음
2003-04-07 20:52
똘또리 사브레는 맛있는 것이어요 그런데도 포기하셨다니 -_- 갑작스레 방문해서 쌩뚱맞은 소리하고 갑니다 -ㅂ-;; 냐하...하...하하... |
2003-04-24 11:02:37 [삭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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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윤기 - 인간과 동물은 평등한가 (동물 권리의 인정은 '인간을 위한' 필요 인가, '그 자체의' 도덕적 의무인가)
『인물과 사상 25권』
2034년, 적도행 열차의 객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가치를 가지며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인식은 현대 문명의 가장 중요한 성취 중의 하나이다.
각 인간이 실제로 평등한가 여부와는 별개로 이런 인식은 현대 사회에 와서 보편화되었다. 아직도 평등권에 대한 인식이나 신념에 대한 반동적 저항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평등을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 인정하고 그것을 실현할 제도들이 다방면에서 개발되었거나 개발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이 평등권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인 동물에게도 허용한다면, 아니 허용해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51년생인 엥키 빌랄은 회화 만화가 주류인 유럽 만화계에서 거의 전설적 인물로 꼽히는 유고 출신 프랑스 만화가이다.
그의 3부작 『니코폴』1)의 제3부 「적도의 추위」에는 그 책이 '만화'라는 점을 유보시키고 보면 참으로 썰렁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때는 2034년 10월 어느 날이다 이 만화 제1부의 주인공 알시드 니코폴은 1993년 군법회의에서 극저온 냉동형을 받고 동면 상태에서 캡슐에 실려 우주로 추방당한 우주비행사이다. 옛 이집트의 주신(主神)으로 우주의 패권을 탈환하기 위해 2023년 지구로 귀환한 독수리 머리의 호루스 신은 이 니코폴을 내세워 파시스트가 지배하던 파리를 해방시키고, 그 파리를 거점으로 자신을 우주에서 추방한 신들을 타도하기 위한 작전에 나서려고 한다. 그러나 파시스트 축출에 성공했던 바로 그 날 니코폴은 신들 세계의 반역자 호루스 신을 잡으려는 우주의 신들에게 암살되었다가 그들에 의해 반쯤 넋이 나간 채 다시 살려져 정신병동에 유폐된다.
이 만화 제2부 「여인의 함정」에서 아버지 니코폴은 신들로부터 도망친 호루스 신과 합께 아프리카 어딘 가로 도주한다. 아들 니코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 우주로 추방당했던 아버지를 TV에서 보고 자기를 빼다 박은 듯한 그 모습에 아버지임을 확신하고 파리 시청에 왔다가 유폐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 행세를 하면서 파시즘 체제 청산 작업을 하는데, 나중에는 정권을 내놓고서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전 세계를 뒤지고 다닌다. 아버지를 소재로 영화를 찍고 있는 아프리카 뎀비폴로(가상도시)의 스튜디오까지 찾아온 니코는 아버지가 2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얘기만 듣고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그곳의 기차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린다. 공교롭게 같은 시각에 도착한 두 대의 열차 중에 그는 단 일각이라도 먼저 도착하는 기차를 타기로 했던 결심에 따라 “남쪽으로!… 적도를 향해!…”, "내려가는 기차"를 타게 된다. (132쪽)
그런데 객실 창 밖으로 기린이 목을 내밀고 있는 “열차 안으로 들어가자 도일 등급이 별안간 혼란을 일으켰다… 지독한 악취가 거의 10까지 올라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와 에쿠아도르를 왕복하는 이 “블루라인특급”의 “아프리카 횡단 열차(TRANS AFRICAN)”는 “만원”이었는데, 각 객실을 채우고 있는 "승객"은 원숭이, 하마, 타조, 낙타, 코뿔소, 표범, 얼룩말, 영양, 사자, 고릴라 등 아프리카 산(産) , 아니 아프리카 출신(出身) 동물들이라. 암사자 옆 창가 자리에는 아프리카 흑인이 긴부리 새와·동석· 하고 있는데 이 광경을 보고 니코는 "꽉 찼어…” “여기도 없군” 하면서 “꽉꽉 들어찬 객차 서른세 량을 지나고 난 후" 비로소 자신의 여행용 가방 위에 뱀을 놓고(아니 '앉히고') 차창 위의 도마뱀과 이웃한 생면부지의 여인, 그러나 자신이 파리 시의 전직 집정관 니코임을 단박에 알아보는 미모의 여성 엘레나의 앞좌석에서 겨우 앉을 구석을 찾아낸다. 그가 그곳에 앉을 수 있었던 것, 아니 "앉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마침 그 자리에 니코 자신의 무릎에 놓아도(아니 '앉아도' ) 여행하는데 아무 지장을 받지 않을 새끼 악어와 어린 구렁이 정도만 있었기 때문이다. (133~134쪽)
여기에서 동물들이 탄 것은 동물 수송차량이나 화물열차가 아니라 '객실' 임에 주목하라. 코뿔소나 암사자는 흑인이 휴대하거나 데리고 가는 애완동물이 아니라(그러기에는 덩치가 너무 크지만) 옆 사람이 누군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모른 척 앉아 있을 권리가 있는 '승객'이다. 니코는 자기보다 힘센 고릴라를 밀치지 못하지만 창가에서 장난하는 조그만 체구의 원숭이도 밀어낼 수 없다. 아니 밀어내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엄연히 '특급' 열차의 승객이다(만화에서는 이 동물들이 직접 승차권을 구입했는지 여부는 나타나 있지 않다)2)
비록 2034년 일이지만 만화에서 상상하는 일이 실현되는 데 보통 한 세대 걸린다고 하면,2003년 현재에서 딱 30년 뒤인 이 시기에 인간인 여러분은 이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동물들과 같은 '승객'으로서 '특급' 열차에 '동승'할 용의가 있을까?
아마 그럴 마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할지 모른다. 미국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깜둥이들'이 백인과 같은 통학버스에 탈 수 있게 된 것, 따라서 백인 아동이 '깜둥이 새끼' 와 같은 좌석에 앉아 학교에 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은 1960년대 초 대법원 판결이 있고 난 뒤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약 40년이니 30년이면 그리 먼 시간도 아니다. 통일 전 서베를린의 지하철 9번 노선(U9)은 종점이 크로이츠베르크구였는데, 그 노선의 별명이 '양파 특급(Zwiebelexpress)'이었다.
이유는, 당시 동 · 서베를린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을 따라 동베를린과 경계지역을 이루었던 크로이츠베르크에는 터키 이주 노동자들이 20만이나 살았는데, 그들이 양파를 넣은 요리를 주로 먹어 그 냄새가 몸에 배었기 때문이었다. 양파보다 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마늘을 상용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잘 맡지 못하는 이 냄새를 독일 사람들은 저녁 때 퇴근하는 그 지하철 안에 꽉 찬 터키인들로부터 참으로 잘 맡아냈다. 나도 하루 저녁 생마늘을 몇 통 먹고 택시를 잡아탔다가 기사가 창문 좀 열고 달려도 되냐고 물어 그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유학 선배는 관대한 독일인 기사를 만난 나의 행운을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그 독일인 기사가 나의 지독한 마늘 냄새를 참아내는 동안, 한국사람인 나는 아무리 독일에 오래 살았어도 가끔은 욕지기가 나는 그 지독한 치즈 냄새를 참아야 했다.
양파나 마늘, 또는 치즈 냄새를 서로 참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냄새를 서로 풍기면서도 같은 택시에 '종자가 다른' 한국사람과 독일사람이 승객과 기사로 동승하여 행선지까지 같이 갈 수 있다면, '종이 다른' 인간 여행객과 도마뱀 승객이 같이 여행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무엇인가? 더구나 열대라면 어디에서나 극성이게 마련인 "파리를 정말 잘 잡아먹어" (135쪽) 준다면, 그 도마뱀은 나의 '유익한 동석자'가아닌가? 그 도마뱀과 연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도마뱀과 친교는 맺을 순 있을 것이다.
나의 '이성' 은 분명히 이런 방식과 내용을 사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예감하는 나의 '감정' 에는 여전히 닭살이 돋아 있다. 제자리이긴 하지만 그 어디인가로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는 이 지구를 니코가 탄 아프리카 급행의 확대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 지구에 사는 인간들은 동물을 자신과 동승한 승객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화물칸'에 처박은 '화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에 더 익숙해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동물에게는 행선지나 출생지가 중요하지 않다. 동물이라는 화물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곳에 '하역' 되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용도로 소비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동물은 '차별'당하고 있는가?
동물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임의로 이용하거나 처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 따라서 동물을 인간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불교나 자이나교, 또는 서양 고대의 피타고라스학파와같은 몇몇 사상만 제외하고는 인류의 발생이래 아주 당연시되는 보편적 관행이다. 그런 관행을 문제삼는다고 하면, 문제시되는 것은 그 관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문제삼는 사람 자신일 것이다. 이런 위치의 동물에 대해 '인간이 동물을 차별해왔다' 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인간에게는 낯선 것이다.
'차별(差別, discrimination)'은 보통 차별 받지 말아야 할 어떤 인간 존재를 차별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가 어떤 인간을 두고 그가 차별 받고 있다고 말하면, 그 말 뒤에는 그가 차별 받아서는 안 되는데 차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존재자에게 차별이라는 표현을 적용하면, 그 존재자는 차별하는쪽과 평등하게 취급되는 것이 마땅하며 또 그런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차별' 이라는 말이 이해되는 방식에 대한 이런 해석에 동의한다면 동물을 차별했다는 말은 그 자체가 단어의 역설적 사용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일종의 개그로 취급된다. 그런데 인간이 동물을 차별했다고 해서 그것을 진지한 문제로 제기한다면, 즉각 이런 반문이 날아들 것이다. 즉,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을 차별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이 동물을 자신과 평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말인가?
동물에 대한 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하는 애완성 태도에서부터 자연 상태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관리자적태도, 동물에게 여러 기능을 습득하게 하여 돈벌이를 시키는 상업적 태도, 무엇보다 동물의 여러 부위를 인간의 필요에 따라 먹기도 하고 걸치기도 하고 분해하기도 하는 산업적 태도, 그리고 동물을 인간 생체실험의 대용으로 사용하는 연구자적 태도 등을 그런 태도로 꼽을 수 있다.
분명히 이런 각각의 태도들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각종 관심들(interests)을 반영한다. 이런 관심들을 통틀어 인간이 동물을 '수단적 관심'으로 대한다고 일반화시키면 반발할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동물 애완가들' 이 특히 역정을 낼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개나 고양이, 또 지금은 그 수나 종류가 엄청나게 증가한 각종 애완동물을'사육(breeding)'한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특정 동물을 '사랑(love)'하여 책임지고 키우면서 자기 삶의 동반자로 삼는다고 한다. 그리고 동물을 애완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학대받거나 버림받은 동물들에 대한 '동정심' 또는 '공감(sympathy)'으로 이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인간들에게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이런 동물들이 당하는 고통의 상태를 치유해주고자 하는 '동물 보호론자들'이라면 자신들이 동물을 수단으로 대한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동물에 대해 사랑이나 동정심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호의나 선의는 절대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인간에게, 그리고 이들이 그 대상으로 삼는 동물에게 절대적으로 바람직한 상태를 조성하는 삶과 생명의 가치를 실현하고 향유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권장할 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동물을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희생시키거나 다른 재원을 조달하면서까지 자신들이 애완하거나 보호하는 동물과의 관계나 그것들의 생명을 지속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인간과 동물의 '관계' 라는 측면에서 동물에 대해 가장 인간적인 취급을 보여주는 바로 이런 아름답고 긍정적인 실례들에서 결정적으로 확인되는 양상이 있다. 즉,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의 생명을 '보호'하는 이들이 동물에 대해 아무리 큰 호의나 강력한 선의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감정을 가진 인간 자신에 대해 동물의 관계는 그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수단적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철저하게 '하위종속적(下位從屬的, subaltern)' 이라는 것이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동물에 대하여 다른 인간을 향해 단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동물보호론자들은 자신들이 동정하는 동물에 대하여 다른 인간을 향해 단지 '자신의 보호의욕'을 표명 할 수 있을 뿐이다.3)
만약 동물이 그 자체로서 어떤 본격적인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 물건이나 기계. 나아가 식물 정도로 취급된다면 이런 하위종속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떤 인간이 멀쩡한 볼펜을 버리거나 장난감 인형을 망가트리거나 화초가 자라는 화분을 내동댕이치면 그런 짓을 한 인간이 문제는 될지언정 볼펜이나 장난감 인형 또는 화초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그런 짓들을 한 인간은 무절제, 낭비벽, 부주의함, 난폭함 등 부정적 성벽을 노출하여 다른 인간에게 ‘불쾌함’ 을 유발했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로 비난을 받을지언정 그런 물건들에게 '악행(惡行)'을 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거나 처벌받지는 않는다.
동물 역시, 그렇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런 볼펜이나 인형이나 화초처럼 취급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다. 따라서 기르던 애완동물에게 싫증이 나서 아무 곳에 버리거나(대체로 죽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죽은 동물은 대단히 더러울 뿐만 아니라 시체를 치우는 일은 아주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주어버리더라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지는 않는다. 그리고 고통 속에 신음하거나 죽어 가는 동물을 보호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러지 않은 인간에게 도덕적 비난이나 법적 처벌을 가하는 것은 그다지 당연한 일로 생각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이 자, 소, 돼지, 양 같은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거나 아니면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고 인간에게 유익한 물건을 제조하기 위해 모르모트나 침팬지, 토끼 같은 동물을 실험 매체로 이용한다고 해서 처벌하자고 나서면 그런 사람이 우스갯거리가 된다.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동물에 대한 가혹함(cruelty) 또는 이유 없는 학대 행위를 금지시키는 것은 서양의 경우 19세기 들어 동물의 조건에 대한 개선책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동물은 학대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표현될 수 있는 이 단초적 동물권(動物權. animal rights)의 기본발상은 대단히 '인간 중심적'이었고, 그 기반은 인간의 '인도적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즉,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는 잔혹성에 대한 무감각을 유발하여 인간에 대한 잔혹 행위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물에게 단편적이나마 인간이 누리는 권리와 같은 위격을 가진 그 어떤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 이런 논증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학대받지 말아야 한다는 동물권의 근거를 인간에게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 어떤 부정적 결과에 의존시킬 경우, 그런 결과가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동물을 학대해도 좋다는 결론이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동물을 단지 보호하는 차원이 아니라 권리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이런 논증은 오히려 동물에게 그 어떤 권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종속적으로 취급해도 좋다는 입장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동물권의 인정을 인간의 인도적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 그런 권리의 실현은 그의 호의나 선의에 좌우된다. 따라서 이 경우 인간에게 동물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를 부과할 수 없으며, 그것을 어겼다고 일정한 규제, 나아가 처벌을 가함으로써 동물권을 권리답게 실현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
하지만 동물권이라는 발상 자체에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런 식의 반대 논증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다. 1975년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피터 싱어가 『동물해방』이라는 책4)을 통해 동물의 해방과 권리라는 측면에서 인간과 동물의 하위종속적 관계를 '차별에 근거한불평등'으로 규정하고 나설 때까지 상황은 그랬다. 이 책의 발상을 잠시 활용하여 앞에서 논한 동물의 몸 냄새를 통해 몸 냄새와 외국인의 차별과 평등성이 어떤 양상을 띠는지 잠깐 '사고 실험'해보자.
집에 가고싶은 내가 '고약한 마늘냄새를 풍기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인 택시 기사로부터 승차 거부를 당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그렇다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가려는 고릴라나 하마가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라는 이유로 열차에 타는 것을 거부당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인가? 만약 아니라면, 우리는 냄새나는 동물들과 같이 여행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인 우리의 경우 적어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베를린 택시 기사에게 내가 승차 거부를 당해도 할말이 없게 된다.
그런데 똑같은 고약한 냄새에 대해 그것이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에 문제가 될 경우 냄새를 이유로 동물을 쫓아내는 기사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당연히 인간은 태우지만 동물은 쫓아낸다. 왜냐하면 이 경우 고릴라나 하마는 '고약한 냄새를 풍겨서'가 아니라 '인간' 아닌(non-human) '다른 종'에 속한(of different species) '동물' 이라는 이유로 쫓아내도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동물보다 "(인간이라는) 우리 종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라"는 원칙 (이것을 싱어는 동물을 원천적으로 차별하려는 인간의 "속셈"이라고 표현한다)에 따라 동물이 열차나 택시에 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56쪽) 물론 우리는 보통 이런 원칙이나 속셈을 헤아릴 것도 없이 주인 없이 열차나 택시에 (무단으로)올라타려는 동물이 있다면 당장 쫓아내고 만다(만만할 경우 그냥 걷어차면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동물을 인간에 비해 차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싱어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이유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승차할 수 있는 택시나 열차에서 쫓겨난 이 경우 우리는 명백히 동물을 '차별'했으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다고 얘기한다. 이렇게 인간 아닌 동물이라는 이유에 근거하여 인간에게 했더라면 차별에 해당하는 행위를 동물에게 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인간의 정신 태도를 싱어는 '종(種)차별주의(speciesm)'라고 규정한다. 이 입장에서 볼 때 현대 문명 세계에서 동물은 명백히 차별 당하고 있다.
싱어는 명백하게 인간과 동물의 “불평등한” 관계, 또는 인간이 동물을"차별"하고 “횡포를 부리는” 상태, 그리고 이런 상태를 기반으로 인간이 동물을 "착취한다"라는 극단적 표현을 쓰고 있다. (315. 358쪽) 불평등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역사에서나 나옴직한 이런 용어를 통해 싱어는 동물이 해방되어야 하고, 그것도 인간과 평등한 상태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인지할 수 없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여지없이 "종차별주의자(speciest)"로 단정한다.
인간 평등권의 윤리적 원리로서의 ‘고통지각 능력’
단지 '동물이 인간과 다르게(differently) 취급되어 그 결과 학대당하는 것'과 '동물이 차별 당하여(discriminated) 그 결과 동물이 학대당하는 것'사이에는 동물의 그런 부정적 상태를 인지하는 정신 태도와 그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제시하게 되는 해결책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인간은 인간이 그럴 경우를 상정하여 '인도주의적 연민' 에 따라 동물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 즉 좀 덜 가혹하게, 될 수 있는 한 인자하게 대하는 것으로 족하다. 후자의 경우 인간은 단지 인도주의적 연민에 따라 동물에 대한 자신의 처신을 다르게 고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동물이 인간에게 차별 당한다고 규정될 경우 동물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것은 동정심 어린 관대한 배려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평등한 존재로서의 고려(consideration as fundamentally equal beings),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차별 받는 존재자에게 그런 차별을 더 이상 받지 않는 것을 권리로서, 즉 평등권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차별은 오직 그 차별점을 지양한 평등성의 확립을 통해서만 극복되고, 평등을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리로 확인하는 것이 현대 사회가 도달한 중요한 문명적 성과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떤 두 존재자들을 놓고 그들 사이에 차별이 자행되는 것을 확인하고, 그 결과 둘 사이에 평등한 관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단정된다면 이 두 존재자가 맺고 있는 관계의 성질을 '차별' 또는 '평등'으로 규정할 '가치 준거점'이 있어야 한다. 싱어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주장했을 때, 그때 '동물' 의 범위 안에는 분명히 인간이 들어간다. 별다른 성찰 없이 직관적 표상에 따라 단순히 얘기하자면 인간은 그 자신 동물로서 다른 동물과 평등하다고 얘기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동물에 대해 인정할 수 있는 평등의 수준은 그야말로 자연 상태를 향해 하향 평등화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며, 이 상태에서는 도리어 인간이 불평등한 상태에서 다른 종의 동물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사냥감을 두고 사자와 인간이 똑같이 경쟁을 벌인다든지. 인간이 사자를, 아니면 거꾸로, 사자가 인간을 사냥감으로 삼는 것이 자연적 평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며 기를 쓰고 추구할 만한 평등 상태로 인정되지 않는다.)
싱어는 여기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평등권이 확대 · 적용되어 가는 과정의 양상을 논증 이론적으로 추적해간다. 즉 그는 "인종과 신념 또는 성(性)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했을 때 그와 같은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반문한다. (36쪽) 평등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설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도 상식적인 대답이 주어진다
평등주의(egalitarianism)란, 모든인간들(all people)이 평등한 가치(equal worth)를 가지며 사회에서 평등하게 취급되어야(be treated equally) 한다는 믿음을 가리킨다. 평등성에 대한 열정은 민주주의의 심장에 해당된다. 그것은 사회, 정치, 경제 조건의 불평등성에 대한 투쟁을 포함한다. 그 넓은 형태의 평등주의는 모든 인간들이 본질적 인간 본성(essential human nature) 때문에 평등한 도덕적 가치(equal moral worth)를 가진다는 생각을 진전시킨다. 정치적 의미의 평등주의는 민주정치에 있어 모든 시민들의 평등한 존엄성(the equal dignity of all citizens)을 확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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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싱어는 모든 인간을 도덕적으로 평등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바로 이 "본질적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를 반문한다. 계몽주의를 사상적 원류로 하여 전개된 서양 현대의 발전이 우리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쳐준 철학적 교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도덕적 가치를 갖게 하는 인간 본성은 올바르게 도덕적 판단을 하게 만드는 지적 능력, 즉 '이성'이다. 칸트의 윤리론에서 이론적 정점에 도달한 합리주의 전통은 인간은 이성의 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자연 세계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도덕적 행위인지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싱어는 이 이성의 능력으로는 인간 사이에 평등성이 확립되고 확대되는 근거와 과정을 결코 해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성을 비롯해 그 어떤 인간적 능력이나 재능이 인종이나 성이나 계급과 관계없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는가를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38쪽) 따라서 인간들 사이의 실천적 평등성을 인간들이 균등하게 갖고 있는 그 어떤 본성적 능력을 바탕으로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이성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싱어의 견해이다. 즉 인간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려면 지능이나 도덕적 재질, 육체적인 힘 또는 그와 비슷하게 인간이 사실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요인들'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능력'이 서로차이 난다고 해서 특정 관심 사안에서 그 두 사람을 불평등하게 '다루면(처우하면)' 안 된다"는 것이 평등의 도덕적 취지이다. 싱어에 따르면,"인간 평등의 원리는 인간이 실제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이는 근거가 없다), (관심을 가진 문제에 있어서 관련되는) 인간 존재를 어떻게(평등하게) 처우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다. "(39쪽)
따라서 평등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평등한 처우를 받아야 할 존재자의 관심(關心, interest)이다. 즉 어떤 존재자를 평등하게 취급해야(teat) 한다는 것은 바로 그 존재자가 가진 관심이 충족될 수 있는 방향과 방식으로 고려한다(consider))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예 신분의 사람을 평등하게 처우한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노예 신분으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을 충족시키는 쪽으로 그의 처우를 고려 또는 진지하게 숙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존재자의특정 관심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의 평등에 대한 어떤 얘기도 무의미하고 근거 없다. (40쪽) 그리고 어떤 존재자가 가진 관심이든 동일한 관심에 대해서는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철학자나 작가들이 도덕 원리로 내세우는 이른바 관심들에 대한 평등한 고려의 원칙(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의 내용이다.
분명히 인간의 평등권 확보와 확대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성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평등권의 실질적 적용과 실현이 처음부터 글자 그대로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평등의 이념과 도덕적 원칙을 통해 타파시키고자 했던 각종 불평등이 의식화된 순서대로 적어보면 평등 이념의 불평등한 적용은 분명하게 인지된다.
즉, 혈통적 신분에 의거한 봉건적 차별, 경제적 소유권에 의거한 자본주의적 계급 차별, 제국·주의 침탈에 따른 타민족에 대한 인종 차별과 착취, 가부장제의 노출에 따른 성차별, 그리고 아동과 노약자 및 장애자에 대한 차별 등의 순서로 이루어진 불평등 문제제기의 역사는 그 자체가 곧 해방의 역사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 불평등 전선에 따라 농노, 부르주아 상공 시민, 프롤레타리아트 노동자, 노예와 유색 인종 및 기타 피압박민족, 여성, 그리고 아동과 장애인 등이 차별로부터의 해방과 평등권의 쟁취를 지향하는 투쟁을 전개하거나 하는 중이다.
이런 차별들에 관련된 인적 요인들은 대단히 다양하지만 싱어는 이들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평등하다고 확신하고 또 인간으로서 평등성을 획득하게 된 공통의 근거를, 이들 모두가 차별에서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관심을 두었다는 데서 찾는다. 다양한 내용과 형태의 각종 불평등 문제에서 인간은 그 불평등, 즉 차별에서 공통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고통을 회피하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평등했고, 그 관심을 충족시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때 즐거웠다. 따라서 고통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능력(capacity for suffering and pleasure), 즉 감정성(感情性, sentience)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의 필요 충분조건이다.
관심을 가진 모든 존재자에게 그 관심을 충족시키지 못한 데서 오는 고통을 회피하게 하고 관심을 충족시킴으로써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사이에 평등성을 확립하고 확대할 수 있게 된 근거이다. 바로 이 '고통 회피의 원칙(principle of avoidance of the pain)'에 따라 인간뿐만 아니라 감정을 가진 모든 존재자가 보편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할 가능성을 처음 개진한 사람은 영국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었다. 싱어는 그의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나온 다음 구절을 길게 인용한다
폭군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권리를 인간 아닌 동물이 획득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부색깔이 검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을 멋대로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괴롭힘으로 인한 피해를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고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다. 설령 다리의 숫자, 피부에 털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 또는 천골(天骨)의 끝모습 등이 차이 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차이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의 고통을 방관하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성능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담화 능력인가? 하지만 완전히 성장한 말이나 개는 갓난아기 또는 태어난 지 일주일이나 한 달이 지난 아기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또한 우리는 어린아이들에 비해 이 말이나 개와 훨씬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들의 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문제는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사고 할 능력이 있는가, 또는 대화를 나눌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42쪽)
이런 관점에 서게 되면 '고통' ,아니 '고통을 벗어나겠다는 것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인간들 사이의 모든 차별을 타파하고자 하는 관심의 핵심임을 통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싱어는 이 고통 능력이 평등을 지향하는 모든 운동의 동기로 인정될 수 있다면, 평등의 권리가 단지 인간에게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 못지 않게 고통을 느낄 능력이 있는 '인간 아닌 감정 존재자들' , 즉 동물에게도 그 동물이 가지는 관심, 다시 말해 인간과 똑같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자기 삶의 조건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관심에 준하여 평등의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평등권의 인간중심적 이해에 대한 종차별주의 규정의 충격
대부분의 사람들은 싱어의 이런 주장을 단지 철학 마니아의 궤변 유희라고 치부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의 평등, 그리고 동물의 권리 인정(보호가 아니다)을 주장하는 그의 논변은 아주 단단한 논증 내용과 구조, 또 그 논증을 경험적으로 뒷받침할 현실적 증거들을 확보하고있다. 그의 정교한 주장은 전문 철학자들에게만 충격적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리 인간들이 모두 종차별주의자라고 단언한다. 종차별주의자로서 인간은 동물들에게 체계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안겨왔으며, 그럼으로써 부당하고도 쓸데없는 착취를 자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획득한 평등권의 기초마저도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즉 “많은 사람들은 인간 종의 사소한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다른 종의 이익을 희생시키고 있는데” , "이런 작태를 정당화하여 인간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도덕적 논증은 있을 수 없다. " (44~45쪽) 왜 그런가?
모든 종이 평등한 근거를 모든 종이 공통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고통 감지 능력'에서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싱어가 이 능력을 전제로 모든 종이 평등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그의 논변 방식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성적 사고 능력'에 호소한다. 즉 싱어는-그 자신이 명시적으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바로 여기에서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항상 내미는 바로 그 잘난 이성적 사고 능력을 발휘할 것을 촉구한다. 열차나 택시에 타려는 동물에 대해 인간이 애정을 갖든 혐오감을 느끼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 동물을 열차나 택시에서 쫓아내는 것을 당연시하는 우리 의식의 형태와 그 자기모순을 반성적으로 투시하라는 것이다. 일단 그는 동물뿐만 아니라 자기를 제외한 다른 인간에게 동물에 대한 것에 못지 않은 잔학한 고통을 가하는 인간들을 논변에서 배제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동물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들에 대해사도 보편적 평등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인도주의적인 견지에 입각하여 사람에게 일체의 고통을 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어떤 '이유(reason)'에서든 동물에게는 거리낌없이 고통을 가하는 데 동참하거나 그 짓을 방관 또는 용인하는 현상이다. 즉 싱어가 가장 극명한 종차별주의 현상으로 지목하는 문제 현상은 "동물에게는 거리낌없이 고통을 가하면서,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가한 것과 같은 고통을 가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여러 특질 가운데 생명을 가장 중시하는 인도주의자들도 만약 그가 "인간의생명, 그리고 오직 인간의 생명만이 존엄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그는'종차별주의자' 이다. (58쪽)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싱어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한 아이가 매우 심각하고 구제 불가능한 뇌 손상을 입은 채 태어났다고 가정하자. 이와 같은 경우는 간혹 실제로 발생한다. 손상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그 아이는 ‘식물인간’ 이상이 될 수 없으며, 말하거나 사람들을 알아볼 수도 없고, 타인의 도움 없이는 행동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이 거동하기 위해 타인의 어떤 도움을 어떻게 요청할지도 모르며, 자기 인식의 감각을 발달시키지도 못한다.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의 상태가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아이를 돌보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쓸 마음이 없으며, 국가에 돈을 요구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아서 의사에게 아이를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요구했다고 가정하자. 과연 의사는 부모의 요구에 따라 이 신생아를 안락사 시켜도 좋은가?(58쪽~59쪽)
대답은 '아니다' 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존엄성을 보호할 것을 의무시하는 법률이 안락사를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싱어는 종차별주의의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다. 즉 "아이의 생명에 대해 이렇게 존중하자는 쪽으로 말하는 사람도 인간 아닌 동물을 살해하는 데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 경우 이들의 이런 판단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성인이 다 된 침팬지나 개, 돼지 등기타 다른 종의 많은 동물들은 위의 사례에서 제시한 인간다움의 모든 특질, 즉 의사소통 능력, 타인과의 관계설정 능력, 자의식, 그리고 생명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합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 모든 능력에 있어서 뇌 손상을 입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아이를 크게 앞선다. 아무리 지극한 정성을 쏟아도 심각한 정신지체 아동은 개 수준의 지능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그 아이를 죽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인간다운 특질' 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문제되는 아이보다 훨씬 우월한 침팬지, 개, 돼지는 그런 이유조차 고려되지 않고 죽임을 당하고 또 그래도 무방하다고 공인된다. 그야말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는 단지 아이가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에 속하고, 동물들은 그 '종'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지, 생명을 빼앗으면 안 되는 근거인 '생명의 가치' 또는 '생명의 존엄성'에서 차이 나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이렇게 아무런 '합당한 근거(reasonable ground)' 없이 단지 종에 대한 소속 여부에 따라 생명마저도 박탈당한다고 한다면 동물 종들은 명백히 인간 종에 의해 차별 당한다고 봐야 한다. (59~60쪽) 그리고 단지 그 어떤 종에 대한 소속 여부가 생명 부정 또는 박탈의 기준으로 작용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 기준 역시 도덕적으로 합당한 기준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답기를 포기할 경우 즉, 도덕적으로 일관된 신념을 갖고 행위할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경우에만 그런 종차별주의적 기준을 고집할 수 있다.
분명히 싱어는 평등권에 대한 인간 중심적 이해를 극력 회피한다. 하지만 우리가 종차별주의를 계속 고수할 경우 현대 문명에서 여러 고비를 넘기면서 확립된 인간 평등권의 기초가 위협받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동물보다 인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그 ‘우선권’을 정당화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 근거는 ‘차별을 합리화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를 가진 정당성'을 보유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종들에 대하여 바로 그것이 '인간과 다른 종이라는 구별(distinction)을 행하고 그 구별에 따라 다른 종과 인간 종을 사회적으로 차별(discrimination)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사이에서도 '특정 구별'에 따라 '종'을 가르고, 그 종사이의 (우열)관계에 따라 '사회적 차별'을 행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부지불식간에 용인하는 결과에 다다른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한 하위의 존재로 간주하여 동물의 생명을 인간의 목적이나 감정의 수단으로 취급해도 좋다고 한다면, 바로 그 발상의 구조 안에 인간의 평등권을 근본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자폭(自爆)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종차별주의 담론의 이런 자기 모순적 귀결을 회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점에서 인간과 유사한 존재자들이 인간과 유사한 생명권을 갖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싱어는 생명권의 입장에서 종차별주의를 부정하는 논변을 급진적으로 밀고 나간다. 즉, 그에 따르면, “생명에 대한 어떤 기준을 선택하든 우리는 그 기준이 종의 경계와 명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어떤 특정한 '특징' 이 어떤 존재자를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 그 존재자의 생명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고, 그것은 경우에 따라 지극히 정당한 입장이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볼 경우 인간 아닌 어떤 동물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보다 가치 있을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가령 침팬지, 개, 돼지는 심각한 결함을 가진 아이나 어찌할 수 없이 나이 들어 노쇠한 상태에 있는 사람보다 자기 인식 능력이나 다른 존재자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런 동물들은 구제불능의 아이나 노인보다 더 많은 생명권을 갖게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60~61쪽)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싱어의 논변에 따라 종차별주의의 문제점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싱어의 권유대로 실천하기는 힘들 것이고, 이런 감정을 떨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필자가 여전히 상당한 종차별주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종차별주의가 문명적 차원에서 관철되었을 때, 즉 인간의 문명, 특히 현대 문명이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동물에게 고통을 안김으로써 인간과 관련되어 어떤 문제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만은 다시 한 번 투시해볼 필요가 있다.
'먹으면서 해방하자!’
싱어의 『동물해방』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어떤 한 개인이나 집단이 생활 과정에서 특정 동물을 학대하거나 고통에 빠트리는 일의 잔인성을 부각시켰거나 멸종하는 동물들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을 절감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종차별주의의 증거들로 제시한 동물실험과 공장식 동물농장의 실태는 현대 문명의 두 위대한 성취인 과학 기술적 연구체계와 육식성 식사체계가 각종 동물들에게 고통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만 가능했었다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어느 면에서 야생동물 보호라든가 학대받는 애완동물에 대한 인도적 조처는 우리 현대 문명을 버티고있는 '고통의 확대재생산 체계'를 호도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싱어로부터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는다.
일관된 공리주의자로서 싱어는 미국의 수많은 연구기관과 대학 실험실에서 동물에게 인위적인 고통을 조직적으로 가함으로써 행해지는 동물실험이 과연 과학기술적으로 '유용한 결과'를 산출하는지를 반문하고있다 동물실험은 흔히 각종 조건 아래서 일어나는 인간 신체기관의 작동과 반응에 관해 유익한 지식이나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인간에게 혜택을 준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예를 들어 폐암의 발병과 흡연의 정확한 상관관계를 알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에게 여러 달, 나아가 수년 동안 담배 연기를 흡입시키는 실험이 행해진다. 담배 연기 이외의 다른 변수가 개입되면 의미 있게 해석될 수 있는 데이터를 획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동물들에게는 계속 담배 연기만 쐬어야 하는 고통이 지속된다. 그런데 싱어가 보기에 흡연과 폐암의 상관관계는 동물실험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임상관찰 자료에 의해 확보된 증거에 의해 더 정확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암 연구에 수십억 달러의 돈을 계속 투입하고, 그 중 상당 액수가 동물실험에 쓰이는데, 실험자들은 더 많은 자금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작업에 '암 연구'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암과의 싸움에서 계속 패하고 있다. " 우습게도, 동물실험을 할 것도 없이 우리는 폐암 사례의 80~85%가 흡연에서 기인함을 알고 있으며, 담배를 끊음으로써 실질적으로 폐암을 퇴치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많은 동물에게 담배 연기를 흡입하게 하여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폐암을 인위적으로 유발시킨다. 이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또한 사람들은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담배를 피운다. 이런 사람들까지 구하기 위해 동물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실험을 계속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가?'(160~164쪽) 부모와 격리된 아동들의 심리 상태를 알아내기 위해 갓 태어난 고릴라 새끼를 어미 고릴라와 강제로 메어내어 그들이 느끼는 좌절감을 관찰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는 이미 전쟁고아들이 넘치는 난민수용소, 아동보호 기관 등에 넘치도록 이미 조성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동물이 '인간과 유사한' 생체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동물실험이 유용하다고 주장한다면, 그 동물은 실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유사한 생명체로서 살아갈 권리를 존중받아야 한다. 만약 동물이 인간의 생체구조와 다르다고 한다면 인간에게 유의미한 데이터를 제공할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물실험은 무의미하다 어떤 이유를 대든 동물실험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다. 이런 부당함과 부적절함에서 빠져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동물들 역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임을 인정하고 그 생명체의 생명권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에게 삶의 과정에서 닥치는 자연적 역경을 제외하고는 인위적으로 가해지는 그 어떤 부당한 고통 없이 죽을 때까지 자기 생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명의 인간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오직 그 때 그 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한 마리 동물의 생명을 학대하거나 박탈함으로써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이 드는 오직 그 경우에만 동물실험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고통에 대한 얘기의 초점이 인간의 육식을 위해 고기재료가 조달되는 공장식 동물농장의 운영 실태에 이르면 실험동물의 생명권에 대한 이런 엄격한 조건이 한낱 동화에 그치는 것을 절감한다. 이 동물농장에서는 동물의 고통은커녕 동물 자체가 모두 그 농장을 소유하는 대규모 농업회사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제조상품으로 취급된다.
대표적으로 닭의 경우, 그 중 수컷은 알에서 인공적으로 부화되는 그 순간 알을 낳거나 고기를 제공하는 데 아무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암컷과 분리되어 수거용 포대 안에 버려진다. 공장식 영농 초기에 이 수평아리들은 살해용 가스로 처분되었지만 지금은 포대 안에 던져진 동료들의 무게에 짓눌려 인간이 별 신경 쓰지 않아도 포대 안에서 짓눌리거나 질식해서 그 몇 분 안 되는 생을 마감하도록 되어 있다. 살아남은 암평아리들은 인공 제척기를 통과하면서 부리를 모두 잘리고 배터리라고 불리는 좁은 닭장 안에 서너 마리씩 가두어진 뒤 인공 사료를 먹고 속성으로 키워지고 나서 인공으로 쏘여지는 빛을 받으면서 계속 알을 낳도록 강요당한다. 고기용으로 길러지는 육계의 대량사육 현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전형적인 것으로 소개된다
닭이 살고 있는 환경은 그 자체가 건강 위험 지역이다. 닭들이 우리에 수용되어 있는 7주 또는 8주 동안 생산업자들은 잠자리에 까는 집을 바꾸거나 배설물을 제거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환풍 장치가 있어도 공기는 암모니아, 먼지, 그리고 미생물로 가득하다. 한 연구는 이런 환경이 닭의 폐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멜버른 대학의 공중 의학과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 된 농부의 70%가 눈의 따가움을 호소했으며, 약 30% 정도가 규칙적으로 기침을, 그리고 15% 정도가 천식과 만성 기관지염에 걸려 있음을 알아냈다. 그 결과 연구자들은 양계업 종사자들에게 가급적 닭 우리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닭의 방독 마스크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썩어 가는 더러운 암모니아가 덮인 짚 위에서 서고 앉을 때 닭의 다리에는 궤양이, 가슴에는 물집이, 무릎에는 화상이 생기는데, 이로 인해 닭은 고통을 받게 된다. (188쪽)
그런데 이런 닭들이 도살되어 우리 식탁에 오르기 전에 어떤 상태가 되는가?
털이 다 뽑히고 손질이 된 닭의 몸뚱아리는 수백만 가정으로 팔려간다. 사람들은 먹고 있는 죽은 몸뚱아리가 한때 살아 있던 생명체였음을 생각해보지 않으며, 그 생명체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가를 조금도 고려해보지 않고 자신들의 혀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뼈를 훑어 먹는다.(189쪽)
이런 생명 상황은 닭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덩치가 큰 돼지, 송아지, 칠면조 등등 모든 가축에 해당된다. 보통 대규모 사육은 식량 문제의 해결에 큰 기여를 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가축의 대규모 사육과 육식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현대식 식단의 구조가 도리어 식량문제를 악화시킨다는 것이 농업 및 농업경제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인디오들이 1헥타르의 농지를 경작하면 같은 크기의 농지를 현대식 플랜테이션 농법으로 개발할 경우보다 2.5배나 많은 15톤의 농작물을 수확한다. 그런데 이 땅이 대규모로 가축을 사육하는 농장 경영주들에게 넘어갈 경우 헥타르당 고기 생산량은 연간 50kg을 넘지 못한다. 이것은 같은 농지에서 나오는 곡식 소출물로는 500kg 나가는 소 두 마리 정도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계산된 것이다. 서양식 식습관을 기준으로 보면 가축 한 마리를 구성하는 부위 중 절반에 해당하는 털, 뼈, 내장 등이 소비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가운데 수분을 제외하고 사람의 음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고기 부분은 소모된 사료로 큰 가축 몸무게의 2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측정치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먹지 못하는 부분까지 키우기 위해 들어가야 할 곡물을 사람에게 돌리면 도리어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훨씬 유리한 것이다.6) 바로 이 때문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육류 소비를 확실하게 줄여야 하는 반면에 식물이 제공하는 식품의 다양성은 체계적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식품으로 섭취할 수 있는 식용식물의 가지 수는 무려 3천 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적 영향은 어떠하든 “설령 자연적 조건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더라도 그들에게 본래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야성의 행위 패턴과 욕구를 여전히 갖고 있으며, 아직도 본질적으로 '선사시대의 야생에서의 삶'을 영위할 능력이 있는” 가축들에게 그 삶의 작동에 걸맞은 환경 속에서 생명 활동을 할 조그만 권리는 인정해야 한다.7)
싱어가 이들에게 허용하라고 권유하는 다섯 가지 기본적 자유권의 내용은 대단히 소박하여 과연 그것을 권리라는 이름으로까지 치장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그것은 가축들에게 "한 바퀴 돌 수 있고, 몸치장을 할 수 있으며, 설 수 있고, 누울 수 있으며, 사지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을 차별함으로써 스스로의 도덕의식을 마비시키는 희생을 치르지 않을 보다 적극적인 방책은 동물을 죽일 필요 그 자체를 없애기 위해 동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체의 제품을 먹지도 쓰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권 보장의 최종 귀착지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채식주의는 세 가지 측면에서 동물학대에 대한 원천적 방지책이 된다. 우선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가축의 도살과 관련된 가혹 행위와 직접 관련되는 것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고기의 수요를 줄임으로써 가축의 사육 자체를 정지시킨다. 궁극적으로 가축이 먹었을 옥수수 사탕수수. 콩 등의 곡물을 사람에게 돌림으로써 인간의 생명 능력이 증진된다.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면 '먹으면서 해방하자'는 것이다.
잊혀진 문명의 기저
싱어나 그의 철학적 논증에 고무 받은 동물해방론자들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지만 고기를 먹지 말고 채식을 하라는 권고는 2천5백 년 전 인도에서 불교의 교의를 통해 강력하게 제기된 적이 있었다. 역사적인 부처 당시는 아니지만 그가 열반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편찬된 『수능엄경』에는 '살생하지 말라(不殺生)'는 계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주 상세하게 해설되어 있다.
아난다, 이 세상 중생들이 산목숨을 죽이지 않으면 살고 죽는 것(生死)에서 해탈 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수행하는 것은 번뇌를 없애려는 것인데, 죽일 마음을 끊지 않으면 번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설가 근기(根機)가 뛰어나 선정이나 지혜가 생겼다 할지라도 죽일 마음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귀신의 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열반에 든 뒤 말세에는 귀신의 무리들이 성행하여 고기를 먹고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네가 세상 사람들에게 삼매를 닦게 하려거든 산목숨 죽일 생각을 끊어라. 이것이 모든 여래의 둘째 결정인 청정한 가르침이다. 산목숨 죽이는 버릇을 끊지 않고 수도한다는 것은 제 귀를 막고 큰소리를 치면서 남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8)
여기에서 산 목숨은 인간의 목숨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설파하는 계율은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살인 금지의 계율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죽이지 말라'는 살생 금지의 계율이다. 부처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을 가진 것을 죽이게 되었을 때 죽이는 자가 품게 되는 마음의 형태이다. 그 어떤 생명을 죽일 때 아무 마음 없이 그 죽임을 행하게 되지는 않는다. '(생명을)죽일 마음 또는 '(생명을)죽이는 마음' 이 없다면 생명을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죽일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명을 죽이게 되는 경우는 예외이다). 그런데 이 죽이는 마음 또는 죽일 마음은 결국 해탈을 방해하는 번뇌와 바로 연결된다. 이것이 죽이는 자 자신을 위해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하는 주관적 이유이다. 그러나 부처는 죽여지는 생명과의 객관적 관계에서도 생명을 말살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를 부각시킨다.
청정한 비구나 보살은 걸어다닐 때 풀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 하물며 손으로 뽑겠는가. 대자대비를 행한다면서 어떻게 중생의 피와 살을 먹을 것인가. 만약 비구가 명주실이나 풀솜, 비단옷, 가죽신, 가죽옷이나 털붙이를 입지 않고, 짐승의 젖이나 그 젖으로 만든 음식까지도 먹지 않으면, 그는 참으로 세상을 벗어나 묵은 빚을 갚고 다시는 삼계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몸붙이를 입거나 먹으면 다 그들과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575쪽)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죽인 자'와 '죽임 당한 것'이라는 관계를 발생시킨다. 삶과 죽음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상태를 지향하는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관계는 이 생사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인연의 끈이 된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떠나야 할 이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대하는 태도이다. 그와 반대로 어느 면에서 죽을 것은 그것이 죽어야 할 모습 그대로 죽게 하는 것이 또한 가장 아름다운 처신일 것이다.
부처는 고기를 먹는 것을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비구들에게 먹기를 허락한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淨肉)' 는 모두 "(부처님의)신통력으로 변화시켜 만든 것이므로 본래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것도 "땅이 찌는 듯하고 습기가 많으며 모래와 돌이 많아 푸성귀가 나지 못하는' 열대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신통력을 써서 "고기라 이름한 것들'을 마련하여 그곳 열대 지방 비구들을 먹인 것이다. (574쪽)
아마 이것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단백질의 섭취와 관련된 얘기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단백질을 섭취할 방법이 육식만 있는 것은 아니며 식물성 단백질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섭취되면 동물성 단백질과 그 효능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동물을 죽여 그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단백질은 충분히 섭취할 수 있으며, 동물의 생명을 그의 관심대로 충족시켜 주더라도 인간에게는 별다른 손해나 피해는 없을 것이다. 사실 생명의 주된 관심은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그 수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자기에게 허용된 수명대로고통 없이 살다가 죽게 하는 것 이것이 인간 문명이 있어야 할 목적이 아닌가.
1) 엥키 빌랄, 이재형 옮김, 『니코폴: 신들의 카니발-여인의 함정-적도의 추위』(현실문화연구, 2000,10) 원본은 Enki Bilal La Trilogie Nikopol(Gen?ve: La humanoide SA, 1999)
2) 사실 『니코폴』의 기본 배경은 우주시대의 새로운 타자, 즉 고대의 신들로 나타난 외계인 및 외계 생물과의 교류 문제이다. 이들과 지구의 기존 생물체들이 인간 사회에 젖어 들어와 동등한 위격을 갖고 교류하는 상태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는 과학 기술 문명의 극점에서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인간 조건이다.
3) 이런 상태는 물론 동물 권리에 대한 의식과 동물 해방 운동의 확산으로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동물의 상태에 대한 그런 의식화 작업이 행해지기 이전의 이데올로기적 자연 상태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4) 이상 인간중심적 논증과 그 비판에 대해서는 피터싱어, 김성한 옮김『동물해방』(인간사랑, 1999.11. 초판1쇄; 2002.5. 3쇄) 406쪽, 이 책의 원전은 Peter Singer, Animal Liberation(1판은 1975년 오스트레인리아에서 출판되고 2판 New York Revirw ot Books에서 1990년 발간되었다. 같은 곳에서 1995년 3판이 나왔다.)
5) N. Schwartz, “egalitaeianism”.S.M. Lipset.(ed), The Encyclopedia of Democracy. VOLⅡ(London: Routledeg, 1995) 395쪽 (번역 및 강조 필자)
6) 호세 루첸베르거 외, 홍명희 옮김, 『지구적 사고, 생태학적 식생활』(생각의 나무, 2000.12 )21~23쪽
7) 피터 싱어, 김성한 옮김,『동물해방』(인간사랑, 1999) 250쪽
8) 불교성전편찬회 『불교성전』(서울: 동국대학교 역경원, 1972.11 초판; 1998.7. 개정3쇄) 574~5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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