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하나씩 하나씩 생각하자. ‘살인의 추억’은 작품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영화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것이 제시하는 증거들의 ‘늪’에 빠지는 것을주의해야하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는 사람이 영화에 완벽하게‘수긍’하게 만드는 동시에, 영화를 보는 사람의 ‘생각’을 빼앗아가는 것이기때문이다. 영화속에서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은 모든 것을 동원해서 결국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를 찾아내는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그들은 결국 완벽한증거가 없어 범인을 잡지 못하고, 그는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를 보는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속에서 감독이 흘린 증거들을 아무리 모아서범인이 실제 누구라는 것을 짐작한다거나, 혹은 영화속에서 담긴 장면들 하나하나의의미들을 시시콜콜하게 따진다해도 이 영화 전체가 담고 있는 ‘무엇’을 자신의눈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영화가 영화 안에서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고, 그것이 의도하는 의미조차 분명한 경우가 많기에 관객은옴짝달싹 할 수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봉준호감독의 전작 ‘플란더스의 개’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중 하나라고 할 수있는 아파트 군중들의 초현실적인 환호씬은 사람에 따라서 ‘오버’로 느낄수도있고, 매우 독특하고 파격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살인의추억’에서는 거의 모든 것들이 영화안에서 설명이 되고, 심지어는 밑에 깔아놓는것 까지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를 정확히 짚어주기에 관객이 재미있게 봤다, 잘만들었다, 그리고 1980년대의 시대상을 풍자했다, 그리고 정말 세밀하게 묘사했다는식의 말 이상을 하기가 힘든 것이다. 비오는날 벌어진 살인사건을 막을수도 있는상황에서 전경이 데모 막으러 가느라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씬에서 1980년대의희극성을 읽는 것 외에 무엇을 더 설명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해도 ‘리뷰’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 보다 영화를 즐기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영화의 ‘추억’을 따라 그 추억의 느낌을 만들어낸 그무엇에 대한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그것이 비록 ‘살인의 추억’의 두 형사처럼 모든 것을 다 갖춘 상태에서도 결국진실을 잡지 못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논리적으로설명한다해도, 만드는 사람의 의도는 전혀 다를 수도 있고, 혹은 그 사람조차도 그작품이 만들어낸 독특한 느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살인의추억’이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전개를 충실히 함으로서 범인은 못잡더라도‘범인을 못잡아도 괜찮았던’ 영화를 만든것처럼, 리뷰는 만든 사람의 의도를 100%밝혀내지 못하더라도 읽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볼 수 있는 또다른 시각을 ‘충실한방법으로’ 만들어냄으로서 읽는 재미를 줄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몇몇 부분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모든 요소를 통합할 수 있는무엇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해도 여전히 ‘무엇’이 남아있겠지만.
일단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쉽게 들어오는 한가지 특징을 생각해보자.인상적인 캐릭터, 유머, 꼼꼼하게 묘사해놓은 1980년대의 풍경같은 것들도 기억에남겠지만, 이 영화의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실질적인 힘은 ‘논리’이다. 정확하게말하면 모든 사건들에 복선을 깔아놓고, 그것이 말이 되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일반적인 에피소드는 물론 등장인물의 배치에서까지 드러나는 사항이다.이를테면 이를테면 영화 초반 살인현장 조사에서 사람들은 길 위에서 논밭쪽으로자꾸 넘어진다. 이때만 해도 이것은 우스운 일 정도이지만, 이 미끄러지는 모습들은그후 영화속에서 계속 자연스럽게 등장하면서 이것이 이 마을 내부에서 벌어지는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해임당하기전의 구반장(변희봉)과몇몇 사람이 엉뚱하게 넘어지는 듯 하더니 그 다음에는 태윤이 등장할 때 동네여성에게 강간범으로 오인받으며 넘어지며, 비오는날 경찰이 사체를 발견했을때도미끄러진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백광호(박노식)가 기차에 치여 죽을때 두만이광호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기위해 미끄러지면서 결국 광호가 죽게 되는 원인이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시됐던 것들이 영화 의 사건들을 진행시키는 매우 중요한요인들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광호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조용구(김뢰하)와 외부에서 온 대학생의 싸움도, 앞부분에서 용구가 대학생에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복선을 깔아준다.
초반에 등장하는 광호의 증언이 알고보니 목격담이었다는 사실은 영화의 추리를발전시키기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스릴러라는 영화의 특성을 생각해보아도이렇게 미끄러지는 모습같은 장면들 하나하나까지 이유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그리많지 않다. 이것은 그 씬에서만 우발적으로 벌어진것이라고 해도 사람들이수긍할만한 부분이고, 실제로 영화속에서 두만이 미끄러지는 모습은 그렇게강조되진 않는다. 오히려 당연히 그럴 수 있으려니 하는 부분마저도 철저하게 그전의 복선을 다 깔아두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가벼운 웃음꺼리나 여유를 주는에피소드들은 그 후에는 반드시 사건을 이끄는 어떤 이유가 된다. 처음에는 풍경을묘사하는 것 같았던 등화관제도 마지막 살인사건을 막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가되고, 시동이 잘 안걸리는 차를 미는 장면도 처음에는 우스운 것 같지만 결국그것은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를 놓치는 이유가 된다. 여학생의 작은 상처는여학생이 피해자가 된 후 태윤이 그녀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동시에용구가 광호에게 당한 작은(그러나 결국 다리를 자르게 만드는) 상처와도 교묘하게오버랩되며, 그냥 헛소문처럼 받아들여졌던 범인에 대한 소문은 수사 증거를확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그냥 지나가는 것 같았던 그 여학생은 결국피해자가 되고, 비오는 날의 1980년대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잠깐 스쳐지나갈줄알았던 마을 여성역시 피해자가 되며, 처음에는 단역처럼 나오는줄 알았던여형사역시 사건의 단서를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다. 영화는광호의 얼굴이 왜 그렇게 됐는지, 왜 실성했는지까지 일일이 이유를 제시한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과 배경, 그리고 사건들이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영화를이끌어나가기위해 존재한다. 레미콘 공장은 피해자중 한명이 도망쳐야할 곳이자유력한 용의자가 나오는 장소가 되고, 배경처럼 지나가던 기차는 어느순간 광호를죽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심지어 봉준호 감독은 범인에 대한 ‘심증’을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이런 수법을 쓰고 있는 듯 하다. 현규가 터널로 사라지는장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은 미궁속으로 사라진다는, 정말 그가범인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사라진다는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일뿐 ‘결정적인’심증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감독이 흘리는 심증은 다른 곳에 있다. 영화속에서 두번째 유력 용의자가 거짓 진술을 꾸며내기 위해 하는 말속에서 피해자로부터‘돌’에 맞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피해자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성이 진술을할때 여성의 회상에서 범인의 ‘손’은 ‘돌’을 들어 스타킹에 말아 재갈을물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윤이 현규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현규는 ‘손’으로‘돌’을 집어 태윤의 총을 맞춘다. 결국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봉준호 감독은현규가 진짜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결정적인 (영화속의) 증거를 이런식으로 보여준것이다.
논리를 뒷받침하는 우연
하지만 이런 전개는 오히려 비현실적일수도 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모두다그렇게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만약 이 영화의 스토리가지극히 논리적이고 앞뒤가 완벽하게 설명된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반은 사실일지모르지만 반은 ‘착각’일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이런 모든 요소들을 ‘말이되게’ 설명한 것은 감독이 그런 요소들을 ‘선택’한 것이지 실제 상황에서 그렇게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길에서 미끄러지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만 꼭 그때 일어날필요는 없고,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얼핏보면 영화는 태윤이제시하는 근거들 위에 몇가지 단서들을 더 붙여 태윤의 과학적인 수사방법이 두만의‘감’을 이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 영화는 오히려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결정적으로 ‘그래봤자’ 이들은 범인을 못잡는데다가, 태윤이 세운 여러가설들도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범인은 절대로 어떤 규칙을 세우고움직이지 않는다. 빨간옷? 영화안에서 두 번째로 살해되는 여성은 빨간옷을 입지않고도 죽는다. 또 여학생은 비가 올때 죽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학생이죽은 것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범인이 원래 두만의 애인 곽설영(전미선)을 죽일상황에서 그 여학생을 발견하고 범죄 대상을 바꾼 것일 뿐이다. 태윤이 제시하는모든 논리와 근거는 결과를 설명하는 방법은 되지만, 수사의 진짜 돌파구를 마련할수는 없다. 태윤의 말대로 서류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류는,혹은 논리와 근거들은 ‘진실’도 말해주지 않는다. 미국으로부터 날라온 서류가현규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지만, 그것역시 샘플과 현규의 유전자가맞지 않는다는 증거일뿐 현규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그때태윤은 서류를 무시하고 자신의 ‘감’에 의해(논리가 바탕이 된) 현규를 죽이려하지 않는가.
이것은 이 영화의 한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논리와 근거인듯 하지만, 사실 그 근거를 만들어나가는 ‘증거’들은 모두 ‘우발적’인 것이다.그리고 그 ‘증거’들의 태반은 두만은 물론 태윤이 발로뛰어(!) 만들어낸 것이다.흘러나온 소문을 생각하고 학교를 가서 피해자의 집을 알아내고, 엽서를 찾아내려고쓰레기통을 뒤지는 태윤의 모습은 이 수사가 결코 논리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보여준다. 사실 서류로 제시됐다는 것을 제외하면 두만이 범인의 범행수법을생각하면서 말한 ‘무모증’에 관한 것이나 우연일수도 있는 것을 서류가 말한다는이유 하나만으로 찾아나서는 태윤이나 ‘찍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태윤이어느순간 마치 이전의 두만처럼 현규를 잡아 족치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어느순간 갑자기 변화한 것이나, 캐릭터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것만은아니다. 그것은 태윤이 서서히 발로뛰는 수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시에 자신이세운 모든 이론들이 결국 수사에 별 도움이 못되기 때문이다. 결과를 바탕으로한분석은 잘하는 태윤이지만 그는 수사의 전환점을 찾아보라는 신반장(송재호)의물음에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못하다가 여형사의 도움으로 겨우 음악방송을끄집어내고, 반대로 두만은 그게 맞건 틀리건간에 무모증을 이야기한다.
무엇인가 변화하는 이야기
이것은 이 영화가 철저하게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매우균형이 잡혀있는 두가지의 조합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감, 혹은 우연에가까운 사건들과 그것을 분석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논리. 그것은 단지 두 주인공의캐릭터를 설명하는것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동력이다.‘살인의 추억’은 단지 범인을 쫓는 영화가 아니라 태윤과 두만으로 대표되는두가지 특징이 서로에게 변화를 주면서 범인에게 점점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제시하는 작품에 가깝다. 그리고 그 변화는 서로에게 긍정적이다. 태윤은 초반에혼자 구석자리에 앉아있길 원하고 혼자 술집에서 사과를 깎아먹는 그런캐릭터였지만 발로뛰는 수사를 하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 특히 마지막 피해자인여학생과 친분을 쌓게 되면서 그 마을 사람들에 동화되고, 그것은 그의 수사욕을불태우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리고 반대로 두만은 태윤이 펼치는 과학수사의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사건의 피해자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던 관계에서 벗어나오히려 좀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현규를 죽이려는 태윤을저지하며, 그러면서도 현규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는 인간적인 따뜻함을 함께유지한다. 애초에 용의자의 신분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하고, 마구잡이식 수사를 하던그가 냉철하게 사리분별을 하고, 경찰과 용의자의 관계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비록범인은 잡지 못했더라도, 그들은 좀더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이들의 캐릭터의 차이와 상호 변화가 단지 이들만의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매우 변화하지 않고, 모두가‘사적인’ 관계를 쌓고 있는 곳이 살인사건을 계기로 하나씩 분열되기 시작하면서변화하는 이야기이다. 이 곳에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두명의 외부인은 바로 태윤과신반장이고, 이들은 수사의 방향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경찰서를 변화시킨다.태윤은 무조건 감으로만 움직이던 경찰서에 과학수사의 기법을 주장하고, 새로운상관이 부임하게 되면서 그것은 수사의 중심적인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때문에 두만의 감에 의한 수사, 동네 사람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벌이는수사는 상당부분 타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단지 감과 이성의 대립이 아니라, 마을하나가 전체적으로 똘똘 뭉쳐있는 매우 ‘한국적’인 마을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변화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속의 화성군을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이 곳은 철저하게 감성과 마을 사람들내부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곳인 동시에, 그것이 조금씩 변화하려는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에는 더 이상 돌팔이 의사는 없다. 하지만 병원대신 약국과,의사노릇을 하는 간호사출신의 설영이 있고, 그녀는 동네 사람들의 소문을전달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첫 번째 용의자 광호는 물론이고 두만이 초반에수사를 진행시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두만이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이다. 용의자를패고 나서도 식사시간에는 같이 ‘수사반장’을 보는 것이 바로 두만의수사방법이고, 이 동네의 정서이다. 살인자를 저주하는 문구를 적은 허수아비를세워놓음으로서 ‘샤머니즘’의 효과를 노리고, 동시에 살인자에게 양심의 가책을느끼게 하는 그런 비이성적이지만 감성적으로 강한 공동체가 바로 이곳인 것이다.태윤이 오기전까지, 이 마을은 수사현장에서 아이들이 뛰놀아도 제지하지 못하는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이곳에 변화를 일으키는 두가지 배경을 부여한다. 하나는 살인사건자체이고, 또 하나는 화성군의 한쪽에 배치된 레미콘 공장이다. 공장은 일거리를만들어주면서 화성군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외부인을 들여오고,묘하게 그 이후에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영화속의 용의자를 생각해보라.최초의 용의자는 마을 사람인 광호였다가 그 다음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이곳에서사는 인물이 되며, 그 다음에는 완벽한 외지인인 현규가 된다. 그리고 그살인사건은 모두다 가족같았던 마을 사람들을 서로 무서워하게 만들고, 밤에는좀처럼 다니게도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공장이 들어섬으로서 고용이 창출되는대신 외부인이 들어오고,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마을은 결코 예전처럼살아갈수만은 없게 된다. 실제로 이 연쇄 살인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강간살해사건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이 사건은 그당시 변화하고 있었던 한국의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화성군이라는 배경과이곳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실제상황이기도 하지만, 감독이 집어넣은 몇몇설정들에 의해 이곳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하는 요소와 기존의 요소는 매우상징적으로 그당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 농촌 특유의 정서가살아있는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와 거대한 덩치에 외부인이 유입되는 공장이혼재하는 시기.
그리고 여기에 영화속에서 벌어지는 두만의 변화를 합쳐보면 이 영화가 가지고있는 또다른 의미가 어느정도 ‘추측’ 될 수 있다. 영화속에서는 현규에 대한분노를 표출하는 태윤의 대사로 인해 태윤의 변화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지만,사실 더욱 변화한 것은 두만일수도 있다. 두만은 ‘화성군’의 사람이고, 그의변화는 곧 화성군 사람, 더 나아가서 그당시의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있는 사람들, 혹은 한국의 변화이기도 하다. 그는 계속 같은 성격을 유지하고는있지만, 그 안에서 ‘패러다임’이 조금씩 변화한다. 영화 초반에서 그는현장수사의 중요성을 그다지 인식하지 못할정도로 감과 대충의 상식에 기대는인물이다. 범인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눈만 봐도’ 알아서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믿는 것이 그인 것이다.
두만은 광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수사 실적을 올리기 위해 억지로꾸며내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현규를 제외하고 두만이 잡았던 두명의 용의자는두만의 입장에서는 틀림없는 진범이다. 광호의 경우는 실성한데다가 첫 번째 피해자향숙이(실제로는 강간만 당하고 살아난 여자, 그리고 먼저 실종된 여자에 이어 세번째 피해자이지만)를 사건 당일 쫓아다녔다는 목격담이 있었고, 두 번째 피해자는태윤의 수사 방향과 두만의 직관력이 빚어내 잡은 경우이며(이때 이들은 정말 모두발로 뛰게 된다), 세 번째는 피해자의 진술까지 더해져 더할나위없이 범인이라고믿는 인물을 잡아낸 경우다. 어떤 경우에 있어도 두만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않고, 그에 맞게 행동한 것이다. 그가 폭력적인 후배 형사 조용구(김뢰하)와 함께광호에게 행하는 행동들은 그의 수사‘방식’이지 없는 사실을 조작하기 위한 것은아니다. 그는 언제든 그가 잡은 용의자들이 범인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고, 오히려가장 범인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마지막의 현규이다. 그는 마지막에 현규를바라보며 도저히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결국 감에 의존하는 수사에서 이성과감이 조화된, 어떤 또다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는 두만의 수사방식의 변화와 그를 비롯한 수사관들이 용의자를 대하는 태도의변화에서 보다 명확히 나타난다. 두만은 처음에는 용구가 광호를 패는 것을방조하고, 동시에 광호와 함께 짜장면을 먹지만, 그 다음 용의자와는 어느정도거리를 두고 있으며, 용구의 폭력 자체도 상당히 줄어든다. 그리고 마지막 용의자인현규에 이르러서는 모든 수사관들이 현구와 대립한채로 현규와 팽팽한 긴장관계를유지하고, 두만은 더 이상 폭력을 행하지도, 방조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느새‘한국적’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수사방법을 고치면서 범인에게 ‘공적으로’ 보다철저하게 다가가는 한편, 사적으로는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두만이 태윤에게“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어서 머리를 써야하지만 한국은 좁기 때문에 발로 뛰면된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두만을 비롯한 화성군 사람들, 더나아가서는 그것을 ‘한국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함축적으로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두만은 태윤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보다 나은 모습으로변화한다. 두만은 그 스스로 ‘한국적’이라는 것이 매우 가변적이라는 것을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
그렇기 때문에 두만과 용구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두만은용구식의 폭력이 옳다고 믿었기에 행한 것 뿐이고, 그것이 수사에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것을 알자 점차 그것을 줄여나간다. 반면 용구는 끝까지 폭력을 포기하지못한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점점 폭력을 쓰지 못하게 되는 인물일뿐 그폭력적인 성향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인물에 의해용도폐기 된다. 그래서 두만은 패러다임이 바뀐 경찰서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수있지만, 오직 폭력의 패러다임만을 가지고 있던 용구는 그의 수사방법이었던오른발을 잘린채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보다 확대하면 패러다임이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자, 그리고 ‘진짜’ 한국적인 것과 '폭력‘을’한국적‘이라 설파했던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감독이 바라보는 1980년대이다. 이 영화는 단지 한국의1980년대만을 재생하는 영화가 아니다. 물론 충실한 세부묘사는 이 영화가1980년대‘만’을 바라보며 독재정권속에 있었던 숱한 아이러니를 꼬집는영화인것처럼 생각하게도 만들지만, 이 영화가 찾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사회의패러다임이 바뀌는 가운데 1980년대라는 ‘특수한’ 시절이 가진 의미를 찾아내는것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1980년대는 태윤과 두만과 용구가 모두 공존했던 시절이다. 그당시한국은 박정희정권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쳐 ‘도시화’와 ‘문화화’를내세우고 있었고,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은 거기에 가속도를 붙였으며, 사람들은한국적인 것은 ‘전통문화’빼고는 모두 촌스러운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야했다. 서울과 경기도의 거리감이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고(결국 노태우가 신도시개발 계획을 발표하였으며), 사람들은 그 변화의 물결속에서 우왕좌왕하던 때였다.그리고 웃기는 것은 그 변화의 중심에서서 도시화를 부추기고 한국인에게문화화되고 세련되질 것을 요구했던 그 정권이 사실은 가장 야만적이고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독재정권은 폭력으로 사람들을 짓밟고, 데모를진압하느라 사람들이 죽는 것을 방조하지만, 겉으로는 여론의 추이를 신경쓰며고문수사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민주화와 보다 합리적인 삶을 요구하는 사람들의열망은 점점더 커지고, 정권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지만 그렇다고 그사람들의 요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폭력으로 데모를 진압하고, 문귀동이라는경찰이 여성 용의자를 성추행하는 사건이 일어나던 시절, 그러나 동시에 그런성추행이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던 시대가 바로 이때였던 것이다.이것은 태윤-두만-용구의 관계는 물론 공장-화성군 사람-살인사건의 관계에도정확히 대입된다. 지극히 한국적인, 혹은 한국안의 세계에만 갇혀있던 두만은태윤을 만나면서 보다 나은 수사관의 모습을 갖추지만 그 중간에는 한국적인 것이아니라 한국적인 ‘탈’을 쓴 폭력형사 용구가 존재하고, 화성군 사람들이 공장이들어오면서 그것에 적응하고 변화할 시기에 갑자기 살인사건이 끼어들어 마을을망쳐놓는다. 영화속에서 범인에게 당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피해자가어디로 뛰어가다가 당하는가. 그녀는 바로 그 공장을 바라보며 뛰어가다가살해된다. 1980년대라는 시대는 우리의 도시화 과정에서, 오히려 도시화를 외치던주체가 그것의 합리적인 발전을 막는 이상한 시대였던 것이다.
한국은 무엇으로 변화하는가
즉, ‘살인의 추억’은 이야기의 완결성을 가지는 동시에 한국 사회의 흐름을짚어내는 역할을 아주 능청스러울정도로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영화일수도 있는것이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는 동안 한국은 수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변화의 원동력을 설명하는 것은 제각각이었으며, 그중에는 독재정권의 기여를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그것이 오히려 기존의 한국적인것과 서구, 혹은 보다 도시화된 삶의 장점들을 흡수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방해가 되었던 존재이며, 이 연쇄살인사건은 그것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논밭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곳은숱한 변화를 겪은 바로 그곳이고, ‘살인의 추억’은 그중에서 가장 혼란스럽고아이러니로 가득했던 시절을 통해 한국사회의 흐름을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이런 관점에서 볼때 ‘살인의 추억’의 오프닝과 엔딩이 가지는 의미는 좀더분명해진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다.오프닝에서 등장하는 아이는 두만의 모습을 무조건 따라한다. 반면, 엔딩에서는여자 아이가 두만에게 범인의 얼굴이 정말 평범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곧 ‘남의것’을 무조건 따라하는 그시절 우리의 모습과, 그후 1980년대를 거쳐 어떤 새로운사회를 맞이하게 된 지금 우리시대가 다시 던지는 질문일수도 있다.
분명히 우리는 그 야만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했고, 계속 앞으로나아가고 있다. 두만이 태윤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다시 형사대신 새로운 직업을찾았듯 우리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노력한다해도우리가 원하는 어떤 사회, 혹은 어떤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찾기 힘들다. 그건알고보면 정말 평범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리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다가설수는 있어도, 결국 그것은 미지의 영역인 것이다. 사건 현장의 그 논밭이그대로 있는 사이에 우리는 독재자가 사라졌고, 폭력이 ‘그나마’ 사라졌지않은가. 하지만 도시화에서 생긴 수많은 문제들이 새롭게 생겨 우리를 괴롭힌다.그러나 분명한건, 그렇게 다가서며 그런 모순을 없애나가는 과정 자체가 매우의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된다
그렇기에 ‘살인의 추억’은 시대적인 배경과 장르적인 측면, 그리고 연출을띄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정말로 훌륭한 것은 하나의 완벽한스릴러 영화를 만들면서 그것이 단지 재미를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움직이는 것이아니라 짜임새있는 영화의 중심된 구조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재미는크게 스릴러적인면, 코미디, 그리고 시대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서 나올 수 있다고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앞에서 말한것처럼 모두 어떤 의미를 가진 것으로설명할수도 있지만, 영화의 스토리내에서도 충실하게 기능하면서 영화에 재미를준다. 모든 것을 하나로 꿰는 논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발적으로 일어나는사건들이 합쳐지는 것은 단지 영화의 의미뿐만 아니라 영화를 진행시키는 실질적인힘이다. 영화에서 논리적인 진행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측하지 못하는 무수한요소들은 논에서 미끄러지는 장면이나 갑자기 일어나는 살인사건처럼 코미디와스릴러를 매우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고, 그것에 모두 ‘이유’를 제시해주는 촘촘이짜여진 스토리라인은 이 영화의 진행을 완벽하게 통제한다. 단지 웃기거나, 혹은긴장감 고조를 위해 스토리가 만들어진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또하나의 중요한 요소인 1980년대라는 시대적인 배경은 단지자세하게 묘사되고, 그당시 정권의 문제들을 들춰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그것이 영화속에서 완벽하게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며 기능하기에 중요한 것이다.이는 단지 전경이 없어서 범인을 잡지 못한다거나 하는 부분에 국한되는 것이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시대가 가진 특성들을 개인개인의 캐릭터에집어넣고, 그들이 사건과 연결되며, 그것을 통해 1980년대 한국사회의 모습을정확하게 집어낸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영화속의 화성군은한국사회의 여러 단면들을 상징적으로 잡아내고 있고, 거기서 잡혀나오는 세세한묘사들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동시에 그시절의 모습을 자연스럽게베어나오도록 한다. 이 영화의 빈틈없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스토리에도 어떤 여유와연민이 느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살인의 추억’이 1980년대라는 ‘배경’이 아닌그 시절의 ‘사람’을 묘사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비싼 의사대신 마을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출신의 무면허 의사(그녀는 아픈할머니를 위해 위험한 밤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응급처치 훈련을 받으면서 들것에실려 가는 것이 좋아 브이자를 그리는 학생, 동네에서 다 받아주는 지체장애자,마치 도시에서 내려온듯한, 상당히 강한 인상을 가지고있는 여성 양호교사.‘살인의 추억’의 등장인물들은 모든 캐릭터가 그 역할과 성장배경에 따라 정확한캐릭터를 보여주고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이야기가 곧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던1980년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1980년대를 지배한 독재정권의모습들과 합쳐지면서, ‘살인의 추억’에서 묘사된 1980년대의 풍경들은따뜻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고 뭔가 광기에 찬듯한 느낌을 함께 담아낸다.등화관제라는 ‘비상식적인’ 상황속에서 그게 신난다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창밖으로 바라보는 신반장의 시선. 그런것이야말로 ‘살인의추억’이 담아내는 1980년대의 모습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인 촬영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어둡고차가우면서도 묘하게 고급스러운 색감을 내는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촬영뿐만 아니라 조명에도 상당한 공이 돌아가야겠지만, 이 영화가 완벽에 가까운짜임새를 갖게 된 것은 그 안에서 영화의 장면에 따라 완벽한 구도를 보여주는콘티와, 그것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촬영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논리와 감으로나눠진 태윤과 두만이 신반장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며 서로의 주장을 하는장면이 잘짜여진 콘티의 위력을 보여준다면, 배경을 중심으로 늘 등장인물들을중심에 놓고, 그러면서 지극히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화면을 만들어내는 촬영은현규를 취조하는 형사들의 모습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는 용구와두만, 광호가 함께 있고 태윤은 멀리 떨어져 있던 상황에서 현규가 잡히고 나서는현규의 반대쪽에서 모두 뭉쳐서 현규를 노려보고 있는 장면이 주는 의미를 전달하는차갑고 무거운 화면이 주는 위력은 그동안 조금씩 유머로 분위기를 풀었던 영화를한순간에 끌어올린다.
또한 영화의 주연을 맡은 송강호와 김상경의 연기는 영화에서 감독이 통제하기힘든 요인이면서, 동시에 그런 연기자의 연기야말로 영화를 살아숨쉬게하는역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자칫하면 철저한 스토리에 숨이 막힐수도 있었던 영화에여유를 불어넣는 것은 바로 송강호와 김상경의 인간적인 면에 의해서이다. 식당밥먹는데 왜 자전거 영수증 주냐는 말 한마디로도 사람을 웃길 수 있는 것은송강호라는 배우가 아니라면 힘든 것이었고, 김상경은 논리적인 형사에서 분노의감정에 의해 치닫는 형사의 연기속에 도회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캐릭터의 모습을함께 담아내면서 그런 변화를 도식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영화의 중후반에서 보여주는 ‘시골 형사’ 두만의 모습에 비해 초반 아이들에게‘엿’을 먹이는 두만의 표정이 지나치게 쿨하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그것을제외하면 이들의 연기는 영화의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20여년이 다되어가는사건을 되살리는 역할을 한다.
완벽한 한국영화
하지만 이런 요소들보다도 ‘살인의 추억’이 인상적일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영화 자체내에서는 완벽하게 짜여진 스토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클라이막스는 결국 태윤의 ‘분노’로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다 잡은줄만 알았던범인을 1980년대의 독특한 상황 때문에 놓치고, 또 잡는다해도 오히려증거부족이라는 ‘논리’적인 측면에 의해 가로막히게 되는 사이 태윤은 화성군의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논리로만은 설명될 수 없었던 어떤‘감정’을 가지게 되면서 영화안에서 강렬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은지나칠정도로 촘촘하게 짜여있어 갑갑하게 느껴질수도 있었던 이 영화를 한번에터뜨려주면서 그동안 범인의 존재에만 초점을 맞추던 관객들을 태윤의 입장에동화시키며 그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함께 느끼게 만든다. 이야기는 논리적으로끌어나가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사이의 감정인 것이다.단지 범인이 누구일까를 넘어 한국의 상황속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한 범인을잡고 싶게 만드는 힘. 그것이야말로 논리와 감성이 공존하는 ‘한국적’인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플란더스의 개’에서 현대 한국사회의 가장 상징적인 배경중 하나인 대규모아파트단지속에서 코미디와 스릴러를 섞고, 그 안에서 한국사회의 이상한아이러니를 보여준 봉준호 감독은 이 작품안에서 그것을 한국에서 있었던 실제사회속에 그것을 보다 매끈하게 녹여내면서 또 한지점으로 나아가는 것에 성공했다.‘플란더스의 개’보다 독특한 면이 떨어진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매우 직접적으로무언가를 보여주고 이야기하려던 ‘플란더스의 개’에 비해 ‘살인의 추억’은 보다‘재미’있고 ‘잘’ 찍었으며, 동시에 보다 전체적이며 깊이있는 이야기를 다루고있다. 우리의 그 시절은 이제 그 살인자에게, 그리고 정권의 가해자들에게는 점점잊혀가는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다시 앞으로나아가는 것은 이제부터이다. ‘살인의 추억’은 그것의 가장 분명한 시작을,지금의 ‘한국’이 가지고 있는 방법들로 풀어냈다. ‘살인의 추억’은 가장 위대한한국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한국영화’로 남을 수도있는 작품이다.
작년 3월 뉴타잎에 나왔던 오세암의 티저 한 장면에 한순간에 반해 기다려 왔던 시간이 벌써 1년이 넘어 버렸네요...
'오세암'이라는 이름이 백담사 암자라는거 어디서 들었는지 어렴풋이 기억속에 가지고 있기에 '오세암'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지요.
2시 즈음에 영화를 보면서 극장안에 있는 많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보면서 저 아이들이 떠들면 나 영화 볼기 힘들겠네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조용히 영화 보는 아이들 덕분에 편하게 볼 수 있었다지요.
나름대로 유명한 스토오리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하니 별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테고, 영화 감상기 쓰면서 스토오리 쓰는거 별로 안 좋아 하기 땜시 스토오리 부분은 그냥 넘어 갑니다.
첫 오프닝 장면부터 실망시키지 않는 파아란 하늘색깔...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가을 들판의 노오란 색깔...
투명한 물 빛...
하아얀 눈 밭...
그 외에도 여러가지 바탕 화면의 색깔들을 참 이쁘게 뽑은게 많은 공을 들여서 만든 영화라는게 티 납니다.
실화로 찍으려 했다면 참으로 고생해야 나올 수 있는 색감들이 멋스럽게 잘 어우러져요.
영화 보는 중간 중간 작은것에도 즐겁게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같이 즐거울 수 있었는데 이 역시 극장에서 영화 보는 재미라지요.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 가고, 슬픔을 조금씩 조금씩 안겨 주다가.....
마지막에 슬픔을 가득 안겨 줍니다.
그 마지막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음악 방송에서 오세암 뮤직비디오가 흘러 나오면 어깨를 들썩 거리며 울었던 제 모습이 생각 나겠지요.
'오세암'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라는 영화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반딧불의 묘' 라는 영화들을 두번 보기 힘든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두번 보기는 힘든 영화가 될것입니다.
(처음 보았던 그 감정을 깨기 싫어서...또 그렇게 우는것이 어쩌면 두려워서...)
그렇게 울고 나서 가만히 앉아서 엔딩크레딧을 지켜 보다가 또 다시 눈물이 흘러 내렸어요.
길지 않은 애니메이션 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길손이와 감이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알지 못한다는게...
많은 사람들이 오세암을 극장에서 접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그런 영화중에 하나로 남겠네요.
마고21에서 전용관을 정하고 역배급을 한다고 했는게 그걸 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우리나라 영화계의 현실이 참 안타까워요...참...
음......
길손이와 감이의 성우를 맡은분의 연기는 상당히 좋았고, 이소은과 윤도현의 주제곡도 의외로 잘 어울렸어요..^^;;
이렇게 짧지만 슬픈...'오세암'을 보았습니다.
가득 받은 슬픔을 가슴속에 담아 오랜동안 지켜 보게 될꺼 같습니다.
성실한 작업으로 DVD를 발매한다면 꼭 구입하고 싶네요.
P.S. 집에 돌아온 저녁 KBS 인간극장의 꾸러기스님들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오세암' 장면들이 자꾸 곂치데요...
그냥..머 그렇다구요...^^;;
꼼토
그렇군요. ^^ 일전에 마리이야기"라는 것도 꽤 보고 싶어 했었는데, 성우진 대신 일반 배우진이 주역으로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안살았다..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오세암의 경우는 괜찮았나봐요.
그러니까 다른 건 다~ 좋은데 목소리에서 망했다는 얘기가..;
극장서 내리기 전에 보러 가야겠네요.
박찬욱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과 제목 글자수도 똑같고, 감독 이름도 비슷한 영화 질투는 나의 힘.
시사회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간이 맞지 않아 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봤다.
너무 늦게 봤나...-_-;;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는 '봄날은 간다'와 비슷한듯 다르다.
너무도 당연한가??
봄날은 간다는 서로간의 사랑 이야기 이고, 질투는 나의 힘은 남자의 질투 이야기 이니까...
영화의 진행은 매우 느긋한..아니 매우 느리다.
천천히 쉬었다 가는 듯..길고 긴 호흡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한 호흡으로 가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질투의 대상 에게 기꺼이 자신을 던져 충성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생소하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은 일상의 조각들은 오밀조밀 하게 모아 놓은 느낌??
이야기들을 나열해 놓기에, 읽는 사람 맘대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꾸며 나갈 수 있는 그런....
그렇기에 이 영화의 엔딩은 알듯 모를듯 이상한 마무리일수도있고, 어떤이의 표현처럼 해피엔딩일수도 있다.
영화 구석구석에서...
특히나 문성근의 모습이 오!수정에서의 모습과 자꾸 겹쳐 보이게 되서 왜그런지 봤더니, 박찬옥 감독이 오!수정 조감독 출신이었다.
물론 오!수정에서 영수와 질투는 나의 힘 에서의 윤식은 매우 다른 캐릭터 이지만, 왠지 자꾸 겹쳐 보이게 된다.
그 둘의 모습은 서로에게 도플갱어가 될듯...
오!수정에서의 문성근의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고 보였는데, 이번 영화 역시 그에게 잘 맞는 옷처럼 편한 연기를 보여준다.
간만에 영화에 얼굴을 보여주는 배종옥의 연기도 참 편안하구, 박해일 역시 신인이라 보기 힘들 정도의 꽤나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다.
역시 연기자는 초창기에 감독을 잘 만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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